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 (문단 편집) === 이성의 증발 === 위와 같은 미쳐 돌아가는 전장이다 보니 장병들에게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도 [[우생학]]과 왜곡된 [[무사도]] 정신이 [[군대]] 내에 널리 퍼져 있고, 미군에 대한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포로로 잡히는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미군 1명이라도 더 죽이고 [[동귀어진]]하려는 집단이었고,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이해할 리가 없었던 미군들은 그런 일본군의 행태에 아연실색하여, 일본군에 대해 더더욱 적개심을 키우며 잔혹해져갔다. 양 전장에서 서로를 같은 인간이 아닌 자신보다 열등한 무언가로 보고, 전술 및 전략적 목표를 위해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 섬 하나 내부의 상대방을 절멸시키기 위해 서로 싸우다 보니, 태평양 전역에서는 [[서유럽]] 전선에 비해 [[이성]]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특유의 잔혹성으로 인하여 [[부비트랩]]과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 위반을 매우 자주 저지르는 야만적인 집단이었고, 비록 전쟁 포로 생환율은 유럽전선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생활에 있어서는 훨씬 열악하다 보니, 미군 역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은 상정 외로 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여기에 미군 소대장ㆍ중대장 등 지휘관들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휘하 부대에 "항복하거나 잡히지 말라"고 말하고 나서 전투를 시작했는데, 이 명령을 내린 배경에는 '''[[jap|쪽바리]] 같은 인간 이하에게 잡히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심을 조장하여 미군들의 전투의지를 더 고양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일본군 역시 사정이 안 좋은 건 매한가지여서, 기존에 존재하던 사이비 [[무사도]]에 따라 포로로 잡히는 걸 수치로 여긴다든가, 일본군 [[대본영]]의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우리들이 무너지면 본토에 있는 가족들이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강간당할 것"이라 믿었다. 더군다나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서 [[미군]]은 말도 통하지 않고, 비록 일본군 스스로에 의해 조장되었다고는 하나 특유의 호전성과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 해병대]]를 보며 마찬가지로 '''저 [[귀축영미]]에게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것'''이라는 공포심 하에 더더욱 잔혹하게 죽을 때까지 싸웠다.[* 참고로 동시기 지구 반대편에서의 [[독소전쟁]]에서는 [[독일]]과 [[소련]]도 상대방이 자국 영토로 밀고 들어오자 국민과 국가를 결집시키기 위해 비슷한 프로파간다를 벌였으나, 문제는 국민들과 군인들에게 사기를 치고 속인 일제의 상황과는 달리 이 쪽의 프로파간다는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나치즘 사상에 입각해 체계적으로, 소련군은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진짜로 상대국의 남성들은 학살했고 여성들은 강간했고 그 결과 독일인 200만명, 소련인 2000만명이 사망했고 1000만명이 넘는 소련 여성이 강간 피해자가 되었다.''' 포로의 경우도 나을 것이 없어 독일에게 잡히면 '''57%'''의 확률로 사망했고, 소련에게 잡히면 굴라크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평생''' 시달려야 했다. 일제와 다르게 거짓은 없었으나 차리리 그게 훨씬 더 나은 끔찍한 상황에 두 국가의 군인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했고, 민간인들은 각각 [[국민돌격대]]와 [[파르티잔]]이 되어서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그러다 보니 태평양 전쟁에서는 [[고대]]의 전쟁터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마경이 펼쳐졌다. [[일본군]]은 포로를 산 채로 해부하거나, [[731부대|생체실험]]과 같은 맨정신이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미친 행위까지 대놓고 버젓이 저지르고, 미군 포로에 대해 처참한 대우를 하면서 [[바탄 죽음의 행진]]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전쟁 포로들이 끔찍하게 숨졌다. 거기다가 종종 기록으로도 발견되지만, 일본군 장교들이 [[미군]] 포로들에 대한 학대 등은 그 참상이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아사하거나 아사하기 직전에 섬을 탈환한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등 [[태평양]] 전역의 부족한 보급 문제 때문에 일본군의 포로 학대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졌다. 거기다가 민간인을 [[부비트랩]]으로 사용하고, 미군의 [[의무병]]조차 사살하거나 부상병과 자폭시키는 등, 일본군의 비이성적인 행보는 전쟁이 진행될수록 심화되기만 하였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접근할수록 일본군의 행각은 꺾이기는커녕, 일반적인 총검 돌격을 넘어 더 끔찍해졌고 심지어 기계화되었다. [[가이텐|자폭 잠수함]][* 사실 자폭 잠수함 자체는 다른 나라에도 없지는 않았다. 물론 타국의 것은 일정 거리까지 잠수부가 조종한 후 탈출하는 식의 위험성은 높지만 생환 가능성이 있는 방식이었으나, 일본의 것은 생환 가능성이 없었다.], [[신요 보트|자폭선]], [[자돌폭뢰|자폭 창병]], [[후쿠류|자폭 잠수부]], [[카미카제|자폭 비행기]], 오키나와 등 점령지 민간인을 이용한 부비트랩,[* 결호작전과 관련된 일본 측의 문헌을 보면 미군이 본토에 상륙했을 때 일반적인 무기들뿐 아니라 죽창이나 부엌칼까지 사용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폭 전차, [[오카|유인 대함 미사일]] 등이 그것으로, 전과 자체는 잘 올리지 못했으나 그 방식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미군 역시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전쟁 초창기에는 비록 적이었으나 일본군에게 연민을 가져 독일군에게 그랬던 것처럼 포로 생포를 시도하거나 일본군 부상병을 치료하며 호의를 베푸려고 한 병사들도 있었으나, 일본군이 항복하는 척 하다가 자폭하거나 가까이 다가온 미군 의무병을 몸속에 숨기고 있던 무기로 죽이는 등 [[배은망덕]]하고 잔혹한 만행을 밥먹듯이 저지르자 미군은 일본군에 대해 조금의 연민과 자비도 갖지 않게 됐고, 이후 일본군 포로를 살해하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등의 보복행위가 매우 빈번해졌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성을 상실하자 일본군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은 일선의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에게 만연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포로 학살이 잦았으며, 이에 대한 기록과 대표 증언인 [[https://youtu.be/2vSf8oMyaN0|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 포로를 살해한 적 있음을 실토하는 전 미 해병 참전 군인의 증언]]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비단 문서 기록 뿐만 아니라 일부 영상물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미 해병이 아직 숨이 붙어 있은 일본군 부상병들을 참호나 토치카에서 끌어낸 뒤 그들을 포로로 잡는 대신 처형하는 충격적인 내용의 영상물이 그 중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과달카날 전투]] 당시에는 포로를 심문을 위해 후방으로 이송하라는 지휘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병대원들이 전투 도중 생포한 일본군 포로들을 전원 학살한 기록도 있으며, 웨이크섬에서의 포로학살의 보복임을 천명했다.[* Stanley Coleman Jersey "Hell's islands: the untold story of Guadalcanal] 태평양 전쟁을 다룬 실화 바탕의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는 미 해병대가 일본군 포로를 받지 않는다는 묘사가 나오며, [[오키나와 전투]]를 다룬 화에서는 항복하는 일본군들을 망설이지 않고 즉각 사살하는 장면도 나온다.[* 바로 다음에는 항복한 일본군 포로를 무장해제 시킨 뒤 총살해버리는 장면도 나온다.] 역시 실화 기반 소설 바탕의 작품인 [[씬 레드 라인]]에서는 분노한 [[미 육군]] 병사가 일본군 포로를 구타하다가 결국 쏴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더군다나 전쟁 후반부에는 [[미 해병대]]와 미 육군의 야전 지휘부에서 [[포로는 필요 없다]]고 명령하며 일본군에 대한 '''박멸을 지시한 기록'''조차 남아있고, 이를 미군 상층부가 제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정도로 빈번했을 정도로[* Niall Ferguson, "Prisoner Taking and Prisoner Killing in the Age of Total War: Towards a Political Economy of Military Defeat", War in History, 2004, 11 (2): p.150][* 미군의 일본군 포로학살에 관한 기사이다. [[https://www.telegraph.co.uk/news/worldnews/asia/japan/1495651/American-troops-murdered-Japanese-PoWs.html|#]]] 태평양 전쟁은 그야말로 오로지 서로를 죽이기만 위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전쟁으로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거기다가 일본군을 같은 인간이 아닌 인간 이하로 보고 있던 일선 병사들이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일본군 시신의 두개골을 떼어내거나, 살아있는 일본군 포로의 신체 부위를 절단하여 기념품으로 챙기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걸 몰래 집까지 갖고 와 창고 따위에 처박아놓기도 했다. 이는 전후에 참전용사가 사망한 이후, 유산 정리를 하던 자손들이 우연히 이 '기념품'을 발견하고선 기절초풍해서 경찰을 부르는 촌극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적개심이 지휘관들에게까지 미쳤고, 그 결과 [[도쿄대공습]] 같은 통상적인 전쟁이라면 상상도 못할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이들이 속출하고[* 전쟁의 승패 혹은 작전의 성공과는 별개로, 아무튼 대규모 민간인을 상대로 대학살극을 자행했으니 정상인이라면 양심의 가책 정도는 느끼며 그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실제로 일부 지휘관이나 폭격병들은 [[PTSD]]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파일럿들이나 폭격병들이 [[사이코패스|공감능력결여]] 증세를 호소하며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인종주의적인 논리도 작용했는데, 최소한 같은 백인종끼리 싸웠던 서유럽 전선과는 달리 일본군은 황인종이었고[* 미국은 1960년대까지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연상시키는 [[미국 흑인 민권 운동|흑백 분리 정책]]을 시행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도 독일계, 이탈리아계와는 달리 일본계는 수용소에 가둬버리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를 발동하는 등[* 다만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가 발동된 데에는 이적 행위가 적었던 독일계, 이탈리아계와는 달리 꽤 많은 수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긴 했다. 미국 정부도 처음부터 일본계들을 잡아넣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사법 체계가 돌아가는 나라에서 이적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까지 단지 그 사람들과 같은 혈통이라는 것만으로 수용소에 가둔 것은 사실이기에 현대 미국에서는 이를 자신들의 [[흑역사]]로 치부하고 있으며, 실제로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인종차별 기조가 매우 강한 나라였다. 실제로 2차대전 당시 미군 수뇌부는 장병들에게 [[짐 크로우 법]]에 의거하여 외국에서도 흑백분리를 지킬 것을 강조하였으며, 이에 반발한 몇몇 영국 술집에서 대놓고 흑인 장병들만을 받아들인 사건도 있을 정도였다.], 일본군 역시 1930년대 이후로 국수주의 기류가 들끓고 개전 이후 '귀축영미' 등의 프로파간다를 열심히 펼쳐온 여파로 대다수의 병사들이 백인, 흑인으로 이루어진 연합군 측을 사람 이하의 것으로 보기 일쑤였기 때문에 태평양 전선에서는 양측 모두 서로를 인종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싸웠던 것이다. 비단 미군 뿐만 아니라 호주군[* 호주군과 함께 참전한 뉴질랜드군도 일본군 포로들에게 자신의 무덤을 파게 한 뒤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해 학살한 사건이 있다. 이 사건 역시 일본군의 포로 학대에 대한 보복으로 촉발된 일이었고 학살에 참여한 뉴질랜드군 병사들은 기소되지 않았다.]도 일본군의 잔혹한 만행에 극심한 [[증오]]를 품고 포로 포획을 거부하거나 포로를 학살하는 등의 보복행위를 빈번하게 자행했다.[* Mark Johnston, Fighting the enemy: Australian soldiers and their adversaries in World War II] 알려진 사건 중 하나로는 [[코코다 트랙 전투]] 중 붙잡은 일본군 포로 대 여섯명을 산채로 총검으로 찔러 학살한 사건이 있다.[* https://www.irishtimes.com/news/australians-killed-japanese-pows-ex-general-claims-1.304172][* Kevin Baker, Paul Cullen, citizen and soldier: the life and times of Major-General Paul Cullen AC, CBE, DSC and Bar, ED, FCA p. 146]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 사건을 목격한 호주군 병사는 "전쟁중이었으니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느꼈다"고 증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